1. 조현병과 기억력의 관계
조현병(Schizophrenia)은 주로 환각, 망상, 와해된 언어 및 행동, 음성증상 등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증상뿐 아니라 내담자들이 힘들어하는 또 다른 증상이 있는데 그것은 기억력저하의 문제입니다. 단순하게 ‘깜빡했다’는 수준을 넘어 일상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기능의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현병 내담자들과 상담을 할 때는 정신병적 증상인 망상이나 환각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인지기능, 특히 기억력과 관련된 문제를 함께 다루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조현병을 단순한 정신병리가 아닌 뇌의 인지 네트워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질환이라는 점에서 기억력 저하는 질병의 중요한 측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조현병으로 인한 기억력 저하의 원인
○ 단기 기억과 작업 기억의 손상
조현병 환자들은 흔히 단기 기억력에 많은 어려움을 겼습니다. 단기기억과 작업기억은 우리가 정보를 일시적으로 저장하고 사용할 때 필요한 능력입니다. 하지만, 조현병 환자들의 경우 이러한 기능에 문제가 생겨 방금 했던 말을 잊어버리거나 방금 배웠던 내용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상담 중 만난 내담자 A 씨는 “상담 시간에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 집에 가면 전혀 기억이 안 나요. 그래서 과제 수행을 하기도 어려워요.”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간단한 대화를 할 때에도 끝까지 듣지 못하고 대화의 흐름을 놓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내담자의 부주의 때문이 아니라 작업 기억의 손상으로 인한 것입니다.
○ 에피소드 기억의 왜곡
에피소드 기억(Episodic Memory)이란, 과거에 실제로 겪은 사건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조현병 환자들은 종종 과거의 사건을 왜곡해서 기억하거나,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기억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이는 망상과도 연결되는 부분으로, 내담자들은 자신이 경험했다고 확신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기억일 수 있습니다. 내담자 B 씨는 자신이 과거에 유명한 사업가와 만난 적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사업가가 자신에게 일자리를 준다며 큰 금액을 기업에 투자하라 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B 씨의 가족들과 검증을 해 본 결과, 실제로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B 씨에게 이 사실을 설명했지만, 그는 여전히 “나는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왜 자꾸 아니라고 하느냐?”며 강하게 반박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에피소드 기억의 왜곡은 망상 형성에도 기여할 수 있습니다.
○ 감정 기억의 과장 또는 무감각
조현병 환자들은 감정과 관련된 기억을 과장하거나 감정적 연결을 완전히 차단하기도 합니다. 어떤 내담자들은 과거의 사소한 사건을 극도로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기억하는 반면, 또 어떤 내담자는 심각한 사건조차도 감정 없이 담담하게 말합니다. 실제 상담에서 C 씨는 초등학교 때 친구와 다투었던 기억에 대해 “내가 피하지 않았다면 그 친구는 아마 나를 죽였을 거예요. 9시 뉴스에 나왔을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교실에서 말다툼을 한 내용이었지만 극도로 부정적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반면, 내담자 D 씨는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그냥 그렇게 된 거죠 뭐.”라고 무덤덤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감정의 왜곡은 조현병 환자들이 기억을 비논리적으로 재구성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3. 조현병 환자의 기억력 저하가 일상에 미치는 영향
조현병으로 인한 기억력 저하는 인지적 불편함에 그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내담자들은 사회적 관계나 직업활동, 자립 생활을 유지하는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 사회적 관계의 단절
많은 조현병 환자들은 기억력 저하로 인해 대화 중 맥락을 놓치거나 과거의 대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친구들과의 약속을 잊어버리거나, 중요한 대화를 왜곡해서 기억함으로써 오해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내담자 E 씨는 최근 자신의 생일에 선물을 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너희들 왜 내 생일선물 안 챙겨줘? 나 무시하는 거야?”라고 말하며 극도로 흥분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당황해하며 “우리 서로 생일선물을 챙기기보다는 맛있는 음식 먹으러 가기로 합의했잖아.”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E 씨는 “나는 그런 합의를 한 적이 없다.”며 분노했고 “앞으로 연락하지 마라.”며 그 친구들과의 관계를 끊었습니다. 상담을 통해 기억 왜곡 가능성을 설명했지만, 신뢰가 무너진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 일상생활의 어려움
조현병 환자들은 일상적인 일정 관리나 간단한 일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치료에 꼭 필요한 약 복용 시간을 잊기도 하고, 약 복용 여부를 잊기도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요리 도중 재료를 빠뜨리거나 약속 시간을 잊어버리는 일들도 반복됩니다. 한 내담자는 “제가 저녁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가 헷갈리더라고요. 그래서 약을 한 봉지 더 먹었는데 나중에 개수를 세어보니 약이 부족하더라고요. 아마 한 봉지를 더 먹었나 봅니다.”라며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 “라면 먹으려고 물을 올려놨는데 방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연기가 나서 가보니 물이 하나도 없이 냄비만 덩그러니 있었어요. 큰일 날 뻔했어요.”라며 놀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실수들은 안전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서 주변의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합니다.
○ 치료 과정의 어려움
치료를 위한 계획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상담 내용을 잊어버리는 경우, 치료의 효과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약물을 자주 빼먹거나 더 먹는 경우, 상담에서 논의한 대처법을 잊어버려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한 내담자는 매주 상담에 참여했지만, 매번 상담 내용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치료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메모를 활용하거나 핸드폰 바탕화면에 과제를 작성기도 하고,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방식도 적용했지만 실제로 과제를 수행하고 적용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4. 조현병 환자의 기억력 관리를 위한 전략
조현병으로 인한 기억력 저하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겠지만, 다양한 전략을 통해 그 영향을 줄일 수는 있습니다.
○ 인지 훈련 프로그램 활용
인지재활치료(Cognitive Remediation Therapy)는 기억력, 주의력, 문제 해결 능력 등을 향상하기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내담자의 인지기능 향상을 위해 처음에는 쉬운 퍼즐 맞추기, 기억력 게임, 문제 해결 과제 등을 통해 뇌를 활성화하고, 이후 점차적으로 난이도를 높여가며 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숫자 맞추기나 퍼즐 맞추기도 어려워하던 내담자가 점차적으로 카드뒤집기 등의 기억력 게임에서 높은 점수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내담자의 자존감을 높이고 일상생활에서도 자신감을 줄 수 있습니다.
○ 메모와 시각적 도구 사용
일상적인 정보나 약속을 기억하기 어려운 내담자에게는 메모, 일정 저장, 타이머와 같은 시각적인 도구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내담자 H 씨의 경우 약 복용을 자꾸 잊어버리거나 중복 복용해서 증상이 악화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내담자 행동 개선의 일환으로 벽에 큰 달력을 걸고 날짜마다 복용해야 할 약봉투를 테이프로 붙여두었습니다. 매번 약을 먹을 때마다 날짜에 붙어 있는 테이프를 떼서 약을 복용하는 것입니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이 방법으로 약 복용 횟수를 정확하게 지킬 수 있었습니다.
○ 감정과 기억의 연결 강화
조현병 환자들은 감정과 기억의 연결이 약해질 수 있으므로, 감정을 자극하는 활동을 통해 기억력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음악치료나 미술치료를 통해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게 하여 기억을 강화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많은 내담자들이 미술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긍정적인 감정을 경험합니다. 한 내담자는 미술 치료 시간에 어릴 적 가족여행을 떠올리며 “처음에는 아무 기억이 안 났는데 그림을 그리다 보니 가족들과 대전엑스포에 놀러 갔던 기억이 났어요. 그때 먹은 돈가스가 참 맛있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감각적 자극을 통해 긍정적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5. 조현병 환자와 기억력 저하에 대한 생각
조현병 환자들과의 대화는 종종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들의 기억이 왜곡되거나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상담자로서 중요한 것은 그 말에 대한 사실여부나 정확성을 바로잡는 것보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한 내담자는 종종 “나는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있다. 그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 한다.”라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이럴 때 저는 “그건 망상입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그런 생각이 들 때, 어떤 감정을 느끼시나요?”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내담자는 “무섭고 힘들다.”라고 대답합니다. 때로는 왜곡된 기억 그 자체보다 그 기억에 담긴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또한, 조현병 환자들의 기억력 저하는 그들의 자존감에도 타격을 줍니다. 그들은 종종 “제가 바보가 된 것 같아요. 저는 왜 이렇게 멍청할까요?”라고 말합니다. 이럴 때 역시 그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알아차리고 공감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조현병으로 인해 뇌가 조금 다르게 작동할 뿐, 개인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6. 결론 – 기억력 저하는 조현병의 또 다른 얼굴
조현병을 단순히 환각이나 망상의 질병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조현병 환자들은 기억력 저하나 인지기능의 왜곡으로 삶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상담을 하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점은 조현병 치료의 목표가 단순히 증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일상에서 소소한 기억과 감정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조현병 환자들에게 기억은 불완전할 수 있겠지만, 그 안에는 따뜻한 감정과 소중한 순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상담자로서 그들이 그 기억을 되살릴 수 있도록 다양한 접근을 시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내담자들이 조금 더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걸어가는 상담자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