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다중인격장애 한 사람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개의 기억
어떤 날은 커피를 좋아하다가 어떤 날은 커피를 전혀 못 마시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볼까요? 혹은 어제까지만 해도 친했던 친구가 오늘 낯선 사람처럼 느껴진다면 어떨까요? 그것도 단순한 기분 변화가 아니라, 정말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고,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중인격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DID)를 가진 사람들이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마치 여러 개의 인격이 각기 다른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어떤 인격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완벽하게 간직하고 있지만, 또 다른 인격은 어린 시절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한 인격이 배운 기술이나 언어 등을 다른 인격은 전혀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다중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과연 ‘나 자신’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그들은 왜 같은 몸을 공유하면서도 다른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것일까요??
2. 기억은 어떻게 분리되는가? – 다중인격장애와 해리 현상
다중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기억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기억과는 완전히 다르게 작동합니다. 우리는 보통 모든 경험을 하나의 연속된 기억으로 저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중인격장애 환자들은 특정한 사건을 경험할 때, 다른 인격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기억의 연속성이 단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대체로 극심한 트라우마에서 비롯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되면, 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해리(dissociation)'라는 방어 기제를 사용합니다. 즉, 감당하기 힘든 아픈 기억을 분리하여 다른 인격에게 넘겨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학대를 받던 아이가 그 고통을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뇌는 ‘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 고통을 겪었다고 스스로를 속입니다. 그렇게 다른 인격에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각 인격은 자신이 경험했던 부분만을 기억하고, 나머지 기억들은 전혀 공유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 인격이 길을 걸으며 누군가와 대화를 했다 하더라도 다른 인격이 등장하면 그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마치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독립된 기억 저장 장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즉, 다중인격장애 환자들은 단순한 건망증을 겪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인격이 새롭게 등장할 때마다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인격은 성인이지만, 또 다른 인격은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습니다.
3. 다중인격장애 환자의 기억 특징
다중인격장애 환자들의 기억에는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 인격마다 기억이 따로 존재한다.
각 인격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만을 기억합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인격이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고 기억한 일들을 B라는 인격은 전혀 기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몸은 한 사람이지만 마치 여러 명의 기억이 하나의 몸속에 따로따로 저장되기 때문입니다.
○ 특정 인격만 트라우마를 기억한다.
다중인격장애 환자들은 보통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을 특정 인격이 담당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시절 당했던 끔찍한 경험은 ‘어린아이 인격’이 떠안고 있는 경우가 그 예시입니다. 반면, 다른 인격들은 이 기억을 전혀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뇌가 극심한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워 일부 기억을 숨기고 특정 인격에게만 그 기억을 맡기는 방식의 방어기제를 택했기 때문입니다.
○ 기억의 공백과 단절이 발생한다.
다중인격장애 환자들은 종종 ‘기억의 공백’을 경험합니다.. 아침에 집을 나섰던 기억까지는 있지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면 전혀 다른 곳에 와 있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그 사이 다른 인격이 나타나서 행동했기 때문에 원래의 인격이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해 생기는 일입니다.
○ 같은 사건을 다르게 기억한다.
같은 사건을 겪었음에도 인격에 따라 그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인격은 특정한 사람을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하지만, 또 다른 인격은 그 사람을 위험한 존재로 기억하기도 합니다. 이는 인격마다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건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격에 따라 그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4. 다중인격장애와 기억의 회복 – 기억의 통합은 가능한가?
다중인격장애 환자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기억을 통합하는 것입니다. 즉, 한 인격이 따로따로 가지고 있던 기억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더 이상 기억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기억의 통합이 가능하게 될까요?
○ 트라우마 기억과 마주하기
앞서 살펴본 것처럼 다중인격장애 환자들은 보통 특정 인격이 감당하기 어려운 기억을 회피하기 위해 여러 인격으로 나누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치료 과정에서는 가장 힘든 기억을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다시 마주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매우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힘든 기억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떠올리게 하면 오히려 증상이 악화될 수 있으므로 전문가와의 충분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 인격 간의 소통 연습
일부 다중인격장애 환자들은 인격들끼리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합니다. 특정 인격이 일기를 쓰고, 다른 인격이 그 내용을 읽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기억의 단절을 줄이고, 점진적으로 인격을 통합해 나가는 치료의 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 신뢰할 수 있는 환경 조성
다중인격장애 환자들은 과거 트라우마로 인해 타인을 신뢰하는 것이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치료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안전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치료자를 만나 자신의 감정을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5. 결론 : 다중인격장애와 기억의 의미
다중인격장애는 기억의 장애가 아니라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선택한 극단적인 방어기제 중 하나입니다. 뇌기 감당하기 어려운 기억을 조각조각 나누어 인격을 분리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을 조각내어 나눈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다중인격장애 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기억을 조금씩이라도 받아들이고, 상처를 치유하여 하나의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억은 때로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우리를 만들어 가는 요소인 만큼 치료를 통해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