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사고 후 기억이 왜곡되는 이유
혹시 이런 경험을 해본 적 있지 않나요? 분명히 내가 직접 겪었던 일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르게 기억되는 느낌. 예를 들어, 초등학교 때 집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그냥 살짝 부딪힌 정도였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그날 저녁에 부모님과 함께 응급실에도 갔었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뇌 손상이 발생하면 이런 기억의 변형이 더 심하게 나타납니다. 교통사고나 머리를 부딪히는 사고, 혹은 뇌졸중 등으로 인해 뇌가 손상되면 특정한 기억이 아예 사라지거나, 존재하지 않던 기억이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이는 뇌가 손상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기존 기억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2. 뇌 손상 후 기억이 바뀌는 실제 사례
○ 해리스 몰슨 :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지 못한 남자
1953년 해리슨 몰슨(Henry Molaison)이라는 남성은 간질 치료를 위해 해마를 포함한 측두엽 절제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간질 증상은 다소 완화되었지만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는 능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술 이전 어린 시절의 기억은 완벽하게 가지고 있었지만, 새로운 정보를 장기 기억의 형태로 저장할 수는 없었습니다. 매일 같은 의사를 만나고 있으면서도 "당신을 처음 봅니다"라고 말하고 최근에 경험한 것들이 몇 분 안에 사라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운동 기억은 그대로 유지되어, 피아노 연주나 특정 기술을 연습하면 실력이 향상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사례는 해마가 사람의 뇌에서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 피니어스 게이지 : 성격과 기억이 변한 남자
1848년, 피니어스 게이지(Phineas Gage)는 건설 현장의 노동자였습니다.. 그는 철도 공사를 하던 중 커다란 철봉이 두개골을 관통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살아남았고 의식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고 이후 그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사고 이후 감정조절을 어려워하고 충동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도 매우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사고 이전의 기억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전두엽이 인간의 성격과 감정조절, 의사결정이나 기억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클라이브 웨어링 : 7초 기억을 가진 남자
영국의 음악가 클라이브 웨어링(Clive Wearing)은 헤르페스 뇌염(Herpes Encephalitis)으로 인해 해마와 대뇌 피질의 일부가 손상되면서 심각한 기억 장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의 기억은 몇 초밖에 지속되지 않았고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매번 아내에게 "당신을 처음 보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고, 몇 초가 지나면 또 같은 말을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음악가였던 그는 놀랍게도 피아노 연주 실력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이것은 기억이 단순히 하나의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뇌 영역이 서로의 협력을 통해 작동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 샘 셰퍼드 사건 : 목격자의 왜곡된 기억
미국의 의사 샘 셰퍼드(Dr. Sam Sheppard)는 1954년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재심에서 무죄로 판명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중요시 여겨졌던 요소는 목격자의 기억 왜곡이었습니다. 한 목격자가 경찰의 조사과정에서는 “어두운 형체를 보았다.”라고.” 진술했지만, 몇 주 후 재판에서는 “범인의 얼굴을 분명히 보았다.”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에 밝혀진 기록에 의하면, 그의 기억은 매일 언론에 보도되는 뉴스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 인해 변형된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기억이 외부 정보에 의해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법적 사례로 남아있습니다.
3. 뇌가 기억을 왜곡하는 이유
우리의 뇌는 사진처럼 기억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정보를 조각조각 저장한 후 다시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기억을 구성합니다. 그러다 보니 손상이나 감정적인 요인으로 인해 기억이 달라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뇌가 기억을 왜곡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기억의 공백을 채우려는 뇌의 습성
인간이 어떤 사건의 중요한 부분을 잊어버리게 된다면, 뇌는 기존의 정보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결합해 기억을 스스로 '채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보완효과로 부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억은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반복적으로 떠올리다 보면 점차 진짜 기억인 것처럼 변하게 됩니다.
○ 감정이 기억을 왜곡하는 영향
흔히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충격을 받은 사건이면 기억이 더 오랫동안 선명하게 남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감정이 개인에게 너무 극심한 충격으로 다가올 경우 기억이 단절되거나 왜곡되기도 합니다. 심각한 사고를 겪은 사람들이 “그 순간은 마치 영화처럼 천천히 지나가는 것 같았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같은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기억의 지속적인 재구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떠올리는 기억은 매번 똑같은 형태로 저장되지는 않습니다. 오래된 기억일수록 점점 현재의 사고방식이나 경험과 섞이며 변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의 기억을 회상할 때 현재의 감정 상태가 그 기억을 다시 회상하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4. 기억을 보호하고 신뢰도를 높이는 방법
뇌 손상 후에도 기억을 보다 정확하게 유지하려면 몇 가지 방법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 사건 직후 기록하기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면, 가능한 한 빨리 기록을 남기는 것이 좋습니다. 사건 후 기억이 왜곡되거나 감정에 의해 수정되지 않도록 일기를 쓰거나, 음성 메모를 남기는 것이 좋습니다.
○ 타인의 이야기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기
주변 사람들이 "너 그때 이렇게 했잖아"라고 말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기억과 일치하는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다양한 타인의 이야기가 사실과 다르게 개인의 기억을 변형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객관적인 자료를 활용하기
사진이나 사고 당시의 영상을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것도 기억의 정확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의견이나 기억보다 객관적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 꾸준한 대화와 회상 연습
특정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그 기억을 떠올리고 그 기억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저하되는 기억의 경우 기억력 감퇴를 방지하기 위해 가족이나 친구들과 추억을 지속적으로 나누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기억을 떠올릴 때는 장소, 냄새, 소리 등을 함께 떠올리면 기억력을 더 높일 수 있습니다.
5. 결론 – 우리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
사고가 발생한 후 기억이 바뀌는 이유는 단순히 물리적인 손상 때문만은 아닙니다. 복잡한 뇌의 특성과 감정적인 요소들의 복합적인 이유가 함께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기억을 절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 기억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재구성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어떻게 신뢰해야 할까요? 중요한 순간을 틈틈이 기록하고 감정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억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뇌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